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문단 편집) ===== [[이탈리아 전선]]으로 [[양면전쟁]]에 직면 ===== || [[파일:부대를 시찰하는 회첸도르프.png|width=700]] || || 부대를 시찰하는 회첸도르프 || [[1915년]] [[5월 24일]] 중립을 지키던 이탈리아 왕국이 [[협상국]]에 가담, 제국에 선전포고하면서 참전하게 된다. 그런 이탈리아와 맞서기 위해 콘라트는 10개가 넘는 사단을 [[이탈리아 전선]]으로 보냈는데, [[프란츠 요제프 1세|황제]]와 [[프리드리히 폰 외스터라이히테셴|프리드리히 대공]]은 콘라트에게 과연 이탈리아에 대한 공세를 위해 동부전선의 방어를 약화시키는 것이 맞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자 콘라트는 [[1915년]] [[7월]]부터 갈리치아와 부코비나 전선에 거의 변함이 없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1915년에 해낸 반격의 대성공으로 러시아 제국이 당분간은 공세를 취할 여력이 없을 것이고 러시아군이 잇다른 전쟁으로 전력이 약화되었기에 [[요제프 페르디난트 폰 외스터라이히토스카나|요제프 페르디난트 대공]]의 4군만으로도 러시아를 막아낼수 있을거라 확신하여 동부전선쪽 병력을 보강할 필요가 없다며 이를 황제에게 보장하는 오판을 했기 때문이었다. 팔켄하인은 동부전선의 병력을 계속 서부전선으로 이동시켰다. 하지만 제국군은 1915년에서 1916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기간 동안 수십여 겹의 철조망과 삼중사중으로 구축된 참호선으로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했을 뿐이었다. 동부전선에 배치되어 있는 병력은 [[알렉산더 폰 린징겐|린징겐 집단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제2군, 제4군, [[카를 폰 플란처발틴]] [[병과대장|기병대장]]이 이끄는 제7군 외에 독일 남부군[* 이름은 독일 남부군이고 지휘관도 독일인이지만, 부대 구성원의 대다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었다.]이었다. [[1916년]] 3월 이래 루덴도르프는 힌덴부르크를 총사령관으로 삼아 동부전선의 독일군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지휘체계를 일원화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자신들이 독일군에게 종속되는 듯한 모양새를 좋아하지 않은 콘라트는 이를 반대했다. 따라서 그 무렵까지는 독일-오헝 제국군 간에 단일 지휘체계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이탈리아 국경은 1866년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마련한 조약에 따라 인위적으로 그어진 것이었다. 이 조약으로 오스트리아는 국경지대의 산맥 일대를 자국 영토로 확보하여 이탈리아의 침공에 완충지대를 확보하는 동시에 또 마음만 먹으면 산꼭대기에서 북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 평원지대로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갈 수 있었다. 반면, 이탈리아군은 오스트리아의 어디를 어떻게 공격하든 간에 공세를 벌이려면 험준한 산악지대를 기어 올라가야 했으며, 국경선의 형태 역시 이탈리아군이 직면한 어려움을 더욱 가중시켰다.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의 국경선은 거대한 S자 형태로, 트렌티노 지역에서 오스트리아의 거대한 돌출부가 이탈리아로 깊숙히 파고 들어오고, 이탈리아의 [[우디네]] 돌출부가 오스트리아 영토로 뻗쳐 있는 형상이었다. 두 돌출부 중 잠재적으로 이탈리아에 더 위협이 되는 것은 트렌티노 돌출부였다. 그러나 이곳은 도로와 철도 사정이 열악해서 제대로 된 군사 작전을 벌이기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제국군 지휘관들도 이 지역에서 어떻게 작전을 펼쳐야 할지를 놓고 머리를 싸매야 했다. [[스위스]] 국경지대에서 [[아드리아 해]]까지 400마일 길이로 형성된 아탈리아 전선은 3개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다. 트렌티노와 알프스 산맥, 그리고 이손초강 전선이 바로 그것이었다. 강변을 따라 형성된 약 30마일 길이의 전선은 그래도 좀 덜 험한 언덕지대로 되어 있었지만, 이를 제외하면 거의 전 전선이 험한 산악지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탈리아에게 빼앗긴 베네치아 지방을 되찾으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던 콘라트가 전선에 투입할 수 있던 병력은 당시 39개 보병사단, 10개 기병사단 약 50만여 명이었다. 국경지대에 항구적인 방어진지를 건설하면서 후방 지역의 교통망을 정비했다. 고정방어시설을 구축함에 따라 향후 이탈리아 전선은 주로 정적인 진지전이 될 것이라고 예상되었다. 오스트리아의 철도망은 국경 지대를 따라 평행으로 달리고 있었지만, 이탈리아와는 달리 별다른 지선이 건설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전선으로 물자를 수송하는 데 상당한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제국군이 트렌티노에서 공세를 나섰을 때 공격 기세를 오래 유지할 수 없었다. 이탈리아는 방어진지를 지키고 있는 20개 사단을 상대로 35개 사단을 동원하였다. 그러나 개전 당시 이탈리아군의 전쟁 준비 상태는 엉망이었다. 그럼에도 전 전선에서 공세에 나서면서 제국군을 놀라게 만들었다. 이탈리아군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면서 이손초강 방면에서 오스트리아 영토 내의 여러 거점들을 점령했다. 이후 이 거점들을 중심으로 양측의 전선이 안정되면서 계속해서 벌어질 소모전의 무대가 마련되었다. [[6월 23일]], [[이손초 전투|여러 차례 벌어질 소모전 가운데 첫 번째 전투가 벌어졌다.]][* 이후 11차례에 걸쳐 지속적인 소모전이 벌어지면서 전력을 모두 소모한 이탈리아군은 빈사지경에 빠지게 되었다.] 1915년 말까지 이탈리아군은 이손초강 전선에서 4차례에 전투를 벌이며 전략 요충지인 고리치아를 점령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고리치아 마을은 강력한 제국군 교부도의 보호를 받고 있었고, 마을을 둘러싼 여러 고지를 확보하고 있던 제국군은 공격해오는 이탈리아군에게 무시무시한 화력을 쏟아 부었다. 하지만 이탈리아군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강력한 제국군 방어진지에 병력을 연거푸 투입하면서 공격을 퍼부었고, 그 과정에서 양측은 엄청난 사상자를 냈다. 전투의 규모 자체도 대단해서 제2차 이손초강 전투에서 이탈리아군은 제국군 129개 대대에 대항해 260개 대대를 동원하여 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이런 압도적인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군은 난공불락의 방어진지에서 버티고 있던 제국군을 몰아낼 수가 없었다. 이탈리아군은 16만 1,000명을 제국군은 14만 7,000명의 인명 손실을 입었다. 겨울이 닥치면서 전투의 열기도 가라앉기 시작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